‘책동네의 빌 브라이슨’, 릭 게코스키가 들려주는
사라진 예술작품의 배후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
지난 해 3월 제주도 중문관광단지에 있던 유명한 건축물 ‘더 갤러리 카사 델 아구아’가 철거됐다. 이 건물은 멕시코 출신의 세계적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1931∼2011)의 유작으로, 제주도를 사랑한 건축가가 제주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9년 3월에 앵커호텔 모델하우스로 가설 건축물로 지어진 이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제주도는 지난 2011년 6월 존치기간이 만료돼 철거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에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많은 이들이 철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건물의 건축사적 의미가 높아 멕시코 대사까지 방문해 철거를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 아름다운 건축물은 순식간에 철거되고 말았다.
제주도는 철거 후에 설계도면대로 작당한 장소에 복원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복원 약속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감감 무소식이다. 철거를 반대하던 건축가들은 이전이 이뤄지더라도 햇빛과 물 등 자연을 건축에 반영해 지은 건물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세계적 건축물이 사라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몹시 안타까워했다. 행정과 법의 논리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버린 세계적 건축물을 보면서 우리는 문화예술의 본질과 가치, 그리고 상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은 이처럼 중요한 작품들의 실종된 삶을 그려 보이고 있다. 저자는 상실에 얽힌 문화적 탐욕과 어리석음을 하나하나 들추어낸다. 그러면서 예술작품의 본질과 가치를, 그것의 상실이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다.
무거운 주제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은 박학다식하고 탁월한 이야기꾼 게코스키의 힘이다.
상실된 작품이 주는 갈망과 매혹
1911 년 루브르박물관에 걸려 있던 모나리자가 사라졌다. 2년 후에 발견되었는데, 이탈리아 액자 제작자가 큰돈을 벌 욕심에 그림을 훔쳐다가 침대 밑에 감춰두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루브르박물관 관람객들은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공간으로 계속 몰려들었다. 그 귀부인은 그 자리에 걸려 있을 때보다 사라진 뒤에 더 큰 인기를 누렸다. 모나리자가 걸려 있던 자리로 구름처럼 몰려든 관람객들이 보고 싶어 한 것은 무엇일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T. S. 엘리엇이 쓴 시 [황무지]의 첫 행이다. 현대 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첫 행이다. 하지만 애초에 시인은 첫 구절을 이렇게 쓰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구절은 편집자 에즈라 파운드의 예리하고도 집요한 간섭이 있은 후에야 탄생했다. 결국 시인과 편집자의 ‘합작품’인 셈이다. 그러면 엘리엇이 쓴 초고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시인 바이런의 친구들은 바이런이 죽자 그가 남긴 회고록을 불살라 버렸다. 시인의 사후 명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회고록이 불에 타버렸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나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불에 타버린 두 권의 회고록에 얼마나 나쁜 행실이 담겨 있는지 추측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실상은 그리스 정치인들과 몇 건의 항문성교 정도가 흥미로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회고록이 재가 되어 사라져버림으로써 본래 가치보다 어마어마하게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프 란츠 카프카는 죽기 전에 절친한 친구이자 변호사인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이 쓴 일기, 원고, 편지, 작품 등을 전부 태워버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친구 브로트는 친구의 요청을 무시하고 10년 동안 원고를 정리해 출간을 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카프카를 있게 한 작품들, 그러니까 [소송], [성], [아메리카]가 간행되었다.
1960년대 후반 브로트가 죽으면서 문제가 복잡해진다. 브로트는 죽기 전에 카프카의 가방 두 개를 그의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에스터 호페에게 맡긴다. 호페가 2007년 101살의 나이에 사망하자 회오리가 일기 시작했다. 호페의 딸들이 자신들이 그 가방의 주인이며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에게 내용물을 팔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 이스라엘 당국은 브로트가 원고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 맡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유대인 지식인인 저자 게코스키는, 전 세계 유대인의 작품을 우선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이스라엘의 태도를 걱정한다. 저자는 문화유산을 작가의 고향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생각에 문제가 있다고 여긴다.
19세기 초 엘긴 경이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서 거대한 대리석 프리즈를 떼어내 런던으로 가져온 것에 대해 엄청난 비판을 들었다. 하지만 엘긴 경이 대리석상을 영국으로 가져오지 않았다면 그 유물은 19세기 아테네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파르테논에 있던 대리석은 한 세기가 넘도록 건축 재료로 재활용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문화재 ‘약탈’은 세계 도처에서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여기서 저자는 ‘반환’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한다. 약탈의 결과로 문화 유물이 안전하게 보전되었으며,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만약 유물을 돌려주는 열풍이 불게 되면 우리는 단지 ‘자국의’ 유물만 보유한 박물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편협한 지역 제일주의가 득세할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한다.
이 러한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왜 사라진 예술작품에 매혹되는가? 가치 높은 예술작품의 소유와 처분, 훼손과 파괴를 결정할 권리를 한 개인이나 국가가 행사하는 것은 정당할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법령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본인이나 타인의 예술작품을 임의대로 처분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합당한가? 그 예술품이 단순히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한 국가나 한 문화의 유서 깊은 유물이라면 어떨까?
우리는 사라진 여러 예술작품을 통해 예술의 ‘연약함’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그 어떤 인생도 예술도 영원하거나 불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뭔가가 상실되었다는 데 놀랄 것이 아니라 뭔가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