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한 대기업 상무가 온갖 트집을 잡으며 여승무원을 괴롭히다 급기야 잡지로 얼굴을 때리는가 하면, 어느 베이커리 회장은 이동 주차를 요구하는 호텔 지배인을 장지갑으로 후려쳐서 물의를 빚은 사건이 있었다. 모 분유회사의 영업사원이 대리점 사장에게 마구잡이 욕설을 퍼부은 일이 알려져 사회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화를 끊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당하는 콜센터 직원과, 블랙컨슈머가 날뛰어도 무조건 참아야 하는 백화점·은행·보험사 직원의 이야기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그와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나도 사람이다!"를 외치는 감정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치고 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는 모두 감정노동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다. 938만 서비스업 종사자와 800만 자영업자는 물론 대통령부터 비정규직까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매일같이 감정노동을 하며 살고 있다. 속은 타들어가도 겉으로는 웃어야 하는 감정노동이 ‘갑’과 ‘을’로 상징되는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그리고 약자와 약자 사이에서도 악순환처럼 반복되고 있다. 그 결과 전체 성인들 가운데 4분의 1 이상이 공황장애, 불안장애,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고, ‘심각하게’ 자살을 생각해본 경우도 7분의 1을 넘어섰다. 말할 수 없는 감정노동의 고통과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감정노동의 폭탄 돌리기’가 나와 나의 가족,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를 힘들게 하는가
- 쉽게 ‘힐링’될 수 없는 감정노동의 진실
이 책은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감정노동의 고통이 간단히 ‘힐링’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심각한 감정노동의 현장을 고발하고, 진화심리학과 뇌과학, 문화인류학, 경제학과 미래학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감정노동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각과 함께 감정노동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 저자는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감정노동을 ‘배우가 연기하듯 직업상 다른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자신의 감정을 고무하거나 억제하는 등 우리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관리해야 하는 일’이라고 정의한 것부터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감정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웃음과 친절조차 자본의 한 도구가 되어버린 감정자본주의의 시각에서 감정노동을 바라봐야 한다며, ‘고객만족을 위해 나의 영혼과 감정을 자본에 예속시켜 굴종을 강요하는 행위’로 감정노동을 재정의한다. 감정노동을 개인의 차원이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진단한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가 낳은 ‘소시오패스 자본주의’와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내집단의 도덕률’ 분석에 초점을 맞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의 가치는 감정노동의 진실을 ‘서열’이라는 키워드로 풀어낸 데서 빛을 발한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은 서열 습성이 내재화되어 있다. 서열이 개인의 생존과 종족 보존을 보장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집단에는 서열기제가 엄격하게 작동되며, 보다 높은 서열을 차지하려는 다툼이 치열하게 일어난다. 우리 뇌에도 서열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본능적 심리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어 경쟁에서 밀려나기라도 하면 곧바로 분노와 불행의 감정에 휩싸이게 되고, 동시에 떨어진 서열을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직급이 높은 사람들에게서 행복 물질인 세로토닌이 많이 발견되고 낮은 직급의 사람들에게서 스트레스 물질인 코르티솔이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나, 훌륭한 매너로 주변의 칭찬을 듣던 사람이 어느 순간 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는 모습, 호스트바에 가서 노예 게임을 벌이며 남성접대부들을 괴롭히는 여성접대부들의 행태, 함부로 반말을 하거나 고래고래 악을 쓰는 ‘진상’ 손님들의 추태 등은 모두 이 같은 서열의 원리로 설명된다. 감정노동은 곧 서열노동인 것이다.
이렇듯 극심한 서열주의 사회가 낳은 감정노동의 폭탄 돌리기는 한 개인이나 조직 차원에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감정조차 자본화하는 신자유주의의 틀 속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감정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와 너를 파괴하고 사회를 분노와 위험의 늪으로 빠뜨리는 감정노동에 대한 해법은 무엇일까?
감정노동의 폭탄 돌리기를 멈춰라!
- 감정노동의 장기적·구조적 해법과 단기적·개인적 치유법
이 책의 저자는 26년간 광고대행사에서 감정노동자로 살았다. 광고주를 ‘주님(광고주님의 준말)’이라 부르며 심각한 감정노동을 경험했다. 자신의 경험과 방대한 독서를 통해 감정노동 전문가의 길로 들어선 그가 감정노동 문제의 해결을 위해 내놓은 해법은 간단하다. 기업과 사회, 국가가 나서서 필요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급한 것이 감정노동 교육을 통해 인식을 전환하고 감정노동 전문가를 양성하는 일이다. 성희롱 예방 교육처럼 감정노동 교육을 의무화하면 사회적 인식을 크게 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감정노동 전문가도 10만 명 이상 배출하여 일자리 창출에도 기여할 수 있다.
‘고객은 왕’이라는 개념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감정노동자를 존중할 때에만 ‘왕’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감정노동자를 무시하고 인격적 침해를 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블랙컨슈머, 진상 고객의 설 자리도 없애야 한다. 그들에게 무한 친절을 베푸는 것은 기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악용하게 만들어 금전적 손실은 물론 기업 이미지에 치명적 타격을 입힌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인격적 권리인 ‘감정노동 방어권’을 허락해야 한다. 악성 고객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회사에는 더 큰 이익이 돌아가고, 위험사회를 안전사회로 만드는 토대를 구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는 자본주의 4.0 시대의 문을 여는 길이다.
이 책에는 말단신경이완요법, 거울대화법, 천지호흡법 등 당장의 감정노동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들도 소개되어 있다. 자존감이 짓밟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활용하면 억울함과 분노가 눈 녹듯 사라지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