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풍경]은 소설가 ‘나’의 제자인 ㄱ이 ‘나’에게 간만에 전화를 걸어 난데없이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ㄱ은 어렸을 때 오빠와 부모를 차례로 잃었으며, 한때 작가를 지망했고 결혼에 실패한 여자로 지금은 ‘소소’시에 내려와 살고 있다. 남자인 ㄴ 또한 어렸을 때 형과 아버지가 모두 1980년 5월, 광주에서 살해당하고 어머니가 요양소에 가 있으며, 그 자신은 평생 떠돌이로 살아왔다. 또 다른 여자 ㄷ은 간신히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 처녀로, 그녀의 아버지는 국경을 넘다가 죽고 어머니는 그녀가 증오하는 짐승 같은 남자와 함께 살고 있으며, 그녀 자신은 조선족 처녀로 위장해 어머니에게 돈을 부쳐야 하는 고된 삶을 살다가 소소까지 찾아들었다. 이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파르게 넘어온 자들이 소소에 머무르게 된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설에는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하지만, 서로 갈등하고 서로를 배제하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한 남자가 두 여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한 여자가 남자와 다른 여자 사이에서 번민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 소설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모두 셋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랑하며 사랑받는 자, 오직 둘만 있다. 독특하고 이상한 사랑이다.
그러나 이 소설이 사랑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을 보면 사랑이라는 말이 혹시 인간의 본질적 운명에 대해 매우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아름답고 신비한 소설의 함의를 너무 한정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소소한 풍경]에는 작가 박범신의 독특한 소설론과 함께 삶과 죽음, 존재의 시원, 사랑과 욕망에 따른 인간 본질의 최저층에 대한 박범신만의 특별한 인식론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예민한 상상력을 통해 제자와 그녀가 겪은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것이 바로 박범신의 신작 장편소설 [소소한 풍경]이다.